교회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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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기도 찬양가운데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소양교회

        

 

 

“간추린 교회 창립사"

​     (소양교회 개척되다)  우리 교회는 민족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6.25사변으로 가족이 흩어지고 집과 논, 밭을 잃어버린 수복민과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왔다가 정전이 되어 고향땅 가까이 몰려 온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춘천시내 유엔군 주둔지인 서부시장을 중심으로 지친 몸과 영혼의 애환을 위로하고 감싸주기 위하여 당시 죽림동교회에 출석하던 몇몇 성도들이 거리가 멀어 교회출석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53년도​가 저물어가는 겨울에 판자 집이나 비좁은 셋방도 구하기 힘들었던 시기에 홍순우 신학생은 혼자의 힘으로 예배장소를 물색하던 중 마침 기와집 골에 다락방과 다름없는 목조 2층이 비어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 임시로 다락방 한칸을 얻게 되었습니다.  1954년 1월 30일 황해도에서 피난나온 신앙심이 득심하여 죽림동교회를 출석하던 이응만 집사를 비롯하여 박정순, 최종희 성도와 황준근 심방전도부인을 중심으로 기와집 골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소양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과 집과 가족을 빼앗아 갔으며 웃음과 소망을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나라도 백성의 가난을 해결해 줄 수가 없었으며 부유한 이웃도 없었던 시절, 오직 의지하고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고은 교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렵 문 닫았던 교회들이 하나둘 재건되어 갔고 여기저기 개척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소양로 인근에 성광장로교회, 서부감리교회 그리고 소양성결교회가 서로 바라다 보이는 거리에 세워지고 경쟁하듯 종소리를 울리며 선의의 경쟁을 하는 형제교회와 같은 아름다운 관계를 갖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장의 사진으로 설명이 되듯이 지금도 기와집들과 거리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백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춘천의 양반동네였던 곳을 일제시대에 기와집 골이라고 불릴 정도로 백여 호의 번듯한 기와집 들이 줄지어 동네를 이룬 곳이 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개척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다음날 심방을 나가기에 앞서 다락방교회 앞 화단에 걸터앉아 찍은 소양교회 최초의 사진입니다.

 

 

 

 

 ​ 소양로 기와집골 2층 다락방 교회는 당시 교인 수는 십여 명이었으나 하루가 다르게 교인들이 모이고 더 이상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오래된 목조 건물은 수없이 드나드는 사람들에 의해 삐걱거리는 소리와 건물의 안전도를 위해서 집주인이 교회를 옮겨 달라는 요구에 반년도 되지 않아 교회당을 옮기려고 여러곳의 교회 부지를 물색하게 되었고 그해 초여름에 그리 멀지 않은 기와집골 서쪽끝 언덕 넘어 수복민들이 급히 지은 집들이 가득한 골목길 끝에 30여평의 잡초경사지를 임시로 얻어 땅을 고르고 첫 천막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     (언덕 위 천막교회로 옮기다)  당시에 춘천에는 주변에 군부대가 많았고 특히 소양로와 근화동 일대에는 캠프페이지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군수품으로 사용하던 군용 야전 천막을 구하여 교회 개척 6개월 만에 비록 20평도 안되는 천막교회였지만 다락방 교회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작은 언덕배기 넘어 피난민들 가건물 틈으로 겨우 한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의 골목 언덕길 마루에 잡초가 무성했던 자투리땅을 구하여 맨손으로 풀을 뽑고 땅을 정리하여 군용 천막을 세워처음으로 교회 현판을 달게 되었습니다.

 

  시내 큰 교회에서는 종을 쳐서 교인들에게 예배시간을 알려 주었지만, 우리 교회는 마당도 없는 길가 2층 다락방에 종도 없어서 이웃교회 종소리에 맞추어 예배를 그리는 형편이었는데 전도사님에게는 예배를 널리 알리는 교회 종을 힘껏 쳐보고 싶은 것이 애절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천막교회이기는 하였지만 내 교회였기에 고물상에서 빈산소통을 구하고 나무 기둥 하나를 세워 거기에 거꾸로 매달고, 초라하지만 예배를 알리는 종을 처음히는 날 모두가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교회를 옮기고 곧 초여름이 되면서 천막교회 안은 기름칠한 두꺼운 군대천막이 햇볕에 열을 받으면서 그야말로 냄새와 온기로 숨쉬기조차 버거운 그런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젊은 전도사님의 서료 말씀이 소문이 나서 매 주일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전도되어 교인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당 바닥은 땅을 고르고 가마니를 펴고 그 위에 군용 담요를 까로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는 있었지만 세상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받고 지친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제공해 주는 유일한 안식처였기에 군대 야전 숙소로 사용하는 큰 천막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곧 비좁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     (서부시장 목조교회)  전쟁이 휴전되기는 했지만 6.25동란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춘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북쪽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소양로에는 춘천역과 시내 사이에 넓은 군용비행장이 급하게 조성되었는데 계소 시설공사가 진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서부시장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판자집은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제재소에는 밤낮없이 벌목차들이 줄을이었고, 군수품 장사와 함께 춘천경제의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서부시장은 당시에는 탑거리 시장이라고 헸는데 지금도 국가보물로 관리되는 7층 석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나날이 부흥되어 갔고 너무 환경과 교회가 비좁아 교회터를 물색했습니다.  마침 조정국장로님의 선친께서 당시에 관재국(토지를 관리하는 관청)에 계셨는데 교회출석은 하지 않으셨지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써 주셔서 탑거리 언적위에 임시로 세워졌던 초등학교(춘주초등하교)가 학생수의 팽창으로 중앙초등학교와 근화초등학교로 분리되면서 옮겨가게 되었는데 넓게 조성된 학교부지중 적산부지 150평을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천막교회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커다란 꿈을 가지셨던 홍순우전도사님은 춘천에서 가장 높은 곳에 교회를 머지않아 세울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것을 믿었습니다. 이에 황준근 전도사님을 비롯한 최돈선, 이봉애, 이화광, 최종희 등 여자 집사님들의 기도가 시작되고 1년이 되지않아 드디어 목조교회이기는 했지만 강단실과 기도실, 창고까지 갖춘 40평의 교회를 청장년들과 부녀자까지 동원되어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소양교회 개척 3년만에 십자가를 세우고 춘천시내를 모두 울릴 수 있을 만큼 주물로 제작된 커다란 종탑도 갖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나무로 지었으나 상당부문 헌 목재를 함께 사용하였고 공사를 맡아하시는 도목수가 있기는 하였으나 남자성도님들이 잡부겸 모공일을 도왔습니다. 지붕은 당시 유행하던 루삥 지붕이었고 바다은 마루를 깔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외벽은 나무 벽에 그물망을 붙이고 그위에 시멘트로발라 그럴듯한 시멘트 건물이 되었습니다.

 

 

​     (요선동 기역자(ㄱ자)교회)  1957년 5월 10일 교회건축을 완공하고 감격의 봉헌예배를 드리고 홍운우 목사님은 뜻하신바 있어 군목으로 입대하시면서 교회를 사임하시었습니다. 교회부흥이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곧이어 이만선 2대 모사님께서 부임하시고 김헤문 목사님, 김상하 목사님, 기연식 목사님, 관순찬 목사님이 소양로교회를 이끌어가시면서 조용하면서도 내실을 기하는 소양교회 역사를 이어나가시다가 1974년 3월 19일 드디어 춘천을 한눈에 품어남을 수 있는 요선동으로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강원도교육연구원으로 사용하던 1층스라브 콘크리트 건물로서 구조가 하늘의 기역자와 같아서 세월이 지나서 그 시절을 기억자교회 시절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     (교회당 신축과 부흥 성장시대)  요선동으로 교회를 옮기고 잠시 침체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 이전의 큰 공을 세우신 곽순찬 목사님이 이임을 하시고, 군목으로 사역하시다가 예편하신 이기성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청빙되시면서 요선동 시대의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고, 교회는 서서히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9년 이기성 목사님의 결단과 당회 동의로 드디어 춘천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전을 착공하게 되었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1980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서울로 임지를 옮기시게 되었습니다.


  후임으로 오신 이정익 목사님 역시 군목으로 탄탄한 목회경력을 다지시고 부임하셔서 지금의 교회 건물을 완공하시고 입당과 봉헌을 하므로 춘천을 비롯한 인근의 교회로부터 부러움을 받는 교회로 급성장하여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부흥되어 가고 밤낮으로 기도실에서는 기도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그 후 교회당을 신축하고 좌석이 비좁아 보조의자를 놓아야 할 정도로 소양교회는 부흥 되는 시기였습니다. 담임목사의 체계적인 목회계획과 열정, 성도들의부흥의 열망과 기도운동, 뜨거운 전도 열기로 소양교회는 모든 성장 조건을 갖추고 탄탄하게 부흥되어 갈 시기에 이정익 담임목사님의 서울지역 교회로 전임하심은 교회 안팎으로 성장의 아쉬움을 남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     (소양교회로 우뚝)  1987년 제9대 담임목사로 당시 36세의 이원호 목사님이 부임하면서 새로운 발전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젊고 패기 넘치는 목회사역으로 4.3총력전도대회, 베델성서대학, 1:1제자교육, 평신도교육, 백하루 성경통독, 성경필사대회 등으로 성도들의 신앙교육에 주력하였고, 군장병의 복음화를 위하여 화천 백대대 교회 신축 등을 하였고 또 선천적인 부흥사로서 국,내외 크고 작은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는 등 목회 신념이 뚜렷하였습니다.


  그후 소양제일교회 지교회 분립 개척, 교회확장 및 선교관 건축, 비전 3333운동 등 크고 작은 교회행사를 통해 우뚝 서 가는 교회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창립 63년을 맞아 제10대 담임목사로 김선일 목사님이 부임하면서 소양교회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고 있으며 예배가 기다려지는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